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10 민주 항쟁 (문단 편집) === [[명동성당]] 항쟁 === [[파일:external/i.huffpost.com/slide_352927_3830070_free.jpg]] 시위대가 피신한 [[명동성당]]에는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었는데, 김수환은 [[추기경|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시위대를 잡으려는 경찰을 막아주었다. > '''[[수녀]]들이 나와서 앞에 설 것이고, 그 앞에는 또 [[신부(종교)|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밟고 신부들을 밟고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날 것이다.[* 비장한 어조로 느껴지지만, 의외로 실제 말할 당시에는 담담한 말투였다고.]''' 추기경이 거부하는 상황에서 [[주교]]좌 성당이자 [[한국 가톨릭]]의 상징인 [[명동성당]]에 함부로 경찰을 투입해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은 세계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철통같은 국가 권력이라 하더라도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전두환]]이 벌인 최대의 축제인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자칫 [[유럽]][* 참고로 유럽에서는 [[68혁명]]으로 기독교의 영향력이 크게 약해지고 있었지만, 애초에 68혁명자체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추구했던 혁명이였다.]이나 [[남미]][* [[유럽]]권이라고 해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1930년대부터 70년대 전반기를 거쳐 장기간의 독재정권기를 거쳤던 경험이 있었고, 중남미 국가들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온두라스]], [[칠레]], [[파나마]], [[파라과이]], [[볼리비아]],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에콰도르]], [[페루]], [[도미니카]] 등 대다수 국가에서 군사독재정권이 펼쳐졌지만 1970년대 말을 전후한 시기부터 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시작하여 80년대 중반기에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한국 민주화 운동을 강제진압할 경우에는 그대로 [[보이콧]]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 참고로 남미의 독재는 정말 지독하다 할 정도였다. 대한민국은 북한과 차별화된 이미지를 자아내기 위해서였는지 모르되 최소한 외부세계에 대해 이미지 관리라도 하였지만 남미의 독재국가들은 대외적 이미지 관리도 하지 않았다.]의 [[가톨릭]] 국가들이 올림픽을 [[보이콧]]을 할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교황청]]은 [[명동성당]] 내로 공권력이 투입되거나 시위 진압에 군이 동원될 경우 서울 올림픽에 대한 전면적 보이콧을 검토했다고 한다. 이게 현실이 되었다면 [[1988 서울 올림픽]]은 그대로 물거품이다. 결국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 당시 한통 노조의 파업을 '국가전복행위'라 간주해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경찰을 투입하여 시위대를 체포하였고, 이에 국민들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에 대패를 안겨주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한총련 5기 출범식 이후 1997년 6월 13일에 한총련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와서 '대선자금 공개 및 김영삼 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979158_19482.html|농성을 벌이자]] 성당 측은 '치외법권 지대'가 아니므로 나가달라고 촉구했으며 농성이 장기화될 경우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요구했다. 이후 1998년 퇴출대상 은행 노조들의 천막농성, 1999년 서울지하철노조 파업, 2000년 한통노조 파업, 2016년 [[대구 희망원 사건]] 해결을 위해 장애계 인사들이 올 때도 이들을 성당에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42285&PAGE_CD=ET001&BLCK_NO=1&CMPT_CD=T0016|내모는 등]]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 명동성당 스스로 보수 행보를 걸었다는 주장이 있고, 1989년 이후 천주교 사제들부터 '민주화에서 천주교의 역할을 이제 끝내고 종교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의견이 다수였고 90년대 들어서 김수환 스테파노추기경조차 동의하였을 정도로 천주교 내부에서는 민주화운동에서 천주교는 소임을 다하였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이후 임명된 서울대교구주교들도 명동성당이 민주화는 물론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행위들을 막기 시작했다. 자세한 것은 [[명동성당]] 문서를 참조.] 국민들은 [[명동성당]] 안의 시위대에게 호응하면서, 헌금의 형식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는 등 지지를 표시했다. 여담으로 명동성당 농성 당시 [[조영래]] 등 [[인권]] [[변호사]]들이 시위대와 합류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양복 정장을 착용한 변호사들의 복장을 경찰들이 '''정부 관료'''로 오인하여 처음에는 달리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허나 곧 상황을 파악한 경찰들은 재빠르게 접근을 막아세웠고, 변호사들의 접근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당시의 변호사들이 남긴 회고록 등에 나오는 이야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